1. 후쿠자와유키치의 탈아론
일본인들은 곧잘 일본은 '아시아 국가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탈아(脫亞)-흥아(興亞)의 담론은 일본의 대외정책이나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산출되었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다시 말해 일본이 지리적ㆍ문화적으로 아
비상시 군에게 행정 및 재판권을 부여하는 계엄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 작위 등의 영예수여권, 은사(恩赦)권 등이라는 그야말로 광범위한 대권(천황대권)을 지님을 규정했다. 더욱이 헌법 개정을 위한 발의권도 천황만이 가지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천황의 국가권력의 중추적기능을 장
1. 서론
19세기 말은 아시아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진출로 인하여 문명 간 상호인식의 충돌이 일어났고, 그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국제 정치적으로는 만국공법이라는 서구적 질서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질서와 충돌을 일으켰고,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생활패턴의
만국경영'의 기본이 된다"라고 떠들었다. 여기에 외무경 사와 노부요시도 적극 동조하여,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려는 이때 일본이 먼저 조선을 점령하자고 맞섰다. 이어서 그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할 것을 제의하여, 1870년 10월에 사절을 조선에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는 일본사절이 가져온
탈아론 순서로 정리할 수 있으며 마지막의 탈아론에서 그의 사상의 정점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개인적인 평은 어떻게 내려지고 있는가?
후쿠자와유키치의 매우 검소하고 거짓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정평이 나있다. 흔히 후쿠자와유키치의 7훈이라 불리는 이것은 그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
후쿠자와유키치이다. 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일본의 근대화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후쿠자와유키치는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 나타나기 시작할 때 그의 사상인 ‘탈아입구’를 바탕으로 근대화를 주장하여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 보다 일본의 근대화를 앞
후쿠자와였다. 메이지 시대에 근대화가 추진됨에 따라 문화와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서구의 근대사상과 문명ㆍ생활양식이 유입되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근대화 추진에는 서구의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등을 받아들인 근대 사상가들의 활약이 컸는데, 그 중에서도 후쿠자와유키치가 가장 두드
제1장 서론
후쿠자와유키치(福澤兪吉)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계몽사상가로, '국민국가론의 창시자', '민권론자', '국권론자', '자유주의 경제학자', '절대주의 사상가', '국민의 교사' 등으로 불리우며 최고의 찬사를 받는 인물이다. 더욱이 그는 오늘날 1만엔짜리 일본 최고액 지폐의 얼굴로 부활하
거쳐 발전하는 것으로 파악, 아직 문명에 이르지 못한 나라는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당시 최고에 달한 유럽 문명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일본을 제외한 동양문명을 아직 야만이나 반개의 단계로 바라보았는데, 이러한 입장은 특히 아래에서 잘 드러난다.
I. 후쿠자와 유기치, 그는 누구인가?
(1) 하급 무사의 아들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는 1835년 1월 10일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쿠스케(百助)가 43세, 어머니 오쥰(於順)이 31세 때 태어난 그는 2남3녀 가운데 막내였다. 아버지 하쿠스케는 나카쓰번의 가신(家臣)이었지만 계급이 극히 낮은 하급